[본문] 추억의 바른생활교과서(2-1) 국민학교(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2-1)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미술교과서(인문계고교) 미술교과서(인문계고교)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역사도해교과서(1969) 고등학교 역사 도해 교과서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자연교과서(1-1) 초등학교 (국민학교 )자연 교과서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자연교과서(2-2) 초등학교(국민학교) 자연 교과서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자연교과서(3-1) 초등학교(국민학교) 자연 교과서 추억의 교과서
[본문] 추억의 미술교과서(6학년) 초등학교(국민학교) 미술 교과서 추억의 교과서
[본문] 33관음성지순례-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남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전남 여수 금오산 향일암 33관음성지순례-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남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전남 여수 금오산(金鰲山) 향일암(向日庵) 원효대사(元曉大師)가 659년(의자왕 19)에 원통암(圓通庵)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었다는 내용이 《여수군지》 및 《여산지》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950년(광종 9)에 윤필(允弼)거사가 이곳에 수도하면서 원통암을 금오암(金鰲庵)이라 개칭하였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본사 경남 하동 삼신산 쌍계사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본사 경남 하동 삼신산(三神山) 쌍계사(雙磎寺) 영 호남이 화목하여 화개(和開)의 꽃 피우는 곳, 화개에 있는 쌍계사는 해인사의 말사(末寺)이며 25교구 본사의 하나로, 신라 성덕왕 22년(723)에 대비 및 삼법 화상이 창건하여 처음에는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국보로 지정된 진감 선사 대공 탑비가 있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전남 구례 지리산 화엄사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전남 구례 지리산(智異山) 화엄사(華厳寺) 한국 화엄 10대 사찰의 하나로 조계종 19교구 본사 지리산(智異山) 화엄사 경내에 국보 4점과 보물 5점이 있다. 경내 건물중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 웅장한 외양이 보는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본사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본사 전남 순천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삼보사찰(三寶寺刹)중의 하나인 승보사찰이다. 삼보사찰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三寶, 즉 불佛, 법法 승僧을 말함)를 각각 대표하는 사찰을 이르는 말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娑)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흔적이 많은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본사,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의 흔적이 많은 전남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불리고 서산대사의 부도와 표충사, 초의선사의 일지암을 볼수 있었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본사 전남 장성 내장산 국립공원내 백악산 백양사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본사 전남 장성 내장산 국립공원내 백암산(白巖山) 백양사(白羊寺) . 5대 총림(叢林)중의 하나이다. 총림이란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영축총림 통도사,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이곳을 말한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 동백꽃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 韓国三十三観音聖地巡礼ー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본사 동백꽃으로 유명한 전북 고창 도솔사(산兜率山) 선운사(禪雲寺) 동백은 미당 서정주와 가수 송창식의 아름다운 헌시로 다시 태어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본문]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성역 염광 법성포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성역 염광 법성포. 법성포 좌우두는 인도승 마라난타가 A.D 384년에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하면서 최초로 발을 디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본문] 33관음성지순례- 전나무 숲이 유명한 전북 부안 능가산(봉래산) 관음봉 내소사(来蘇寺)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63) 혜구다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당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 현존하고있는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이다.건설교통부가 2007년에 발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내소사 전나무 숲과 오색단풍 나무 어우러진 길. 33관음성지순례- 전나무 숲이 유명한 전북 부안 능가산(楞伽山, 봉래산) 관
[본문] 33관음성지순례-호남제일의 고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山寺)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장남 신검(神劍)의 반란으로 이곳에 구금되어있다가, 몰래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하여 후삼국 통일에 일조했다. 이러한 사유로 KBS 드라마 태조 왕건 촬영지로 이용되었다. 목조로 된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삼층법당으로 국보62호이고,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미륵전의 미륵보살상은 옥내 입불로서는 세계 최
[본문]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조계종 제5교구 본사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한국 8경 중의 하나로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는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고, 한국의 3대불전(부여의 무량사, 구례의 화엄사)중의 하나인 대웅보전(大 雄寶殿), 국보5호이면서우리 나라 석등중 가장 우수한 쌍사자석등, 국보55호이면서전국에서도 단 하나 뿐인목조 5층 탑파형 건물인팔상전, 국보64호인 석연지등이 있다. 33관음성지
[본문]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김구선생 흔적을 만난,제6교구 본사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충남 공주 있는 마곡사는 충남 일원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또 김구선생께서 민성황후 시해범을 살해후에 탈출하셔서 은둔생활을 하셨던곳이기도 하다.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김구선생 흔적을 만난,조계종 제6교구 본사 태화산 마곡사(麻谷寺)
[본문]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700년된 목조건물 덕숭총림 덕숭산 수덕사(修徳寺)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700년된 목조건물 덕숭총림 덕숭산 수덕사(修徳寺). 5대 총림(叢林)중의 하나이다. 총림이란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영축총림 통도사,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덕숭총림 수덕사, 고불총림 백양사를 말한다. 또 비구니승으로도 유명한 사찰입니다.
[본문]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 - 봉미산(鳳尾山) 신륵사(新勒寺) 남한강변에 우뚝선 봉미산 자락에 안겨있는 강변 고찰.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 순례 - 봉미산(鳳尾山) 신륵사(新勒寺).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 절은 고려 우왕 5년에 절을 크게 짓고 나옹화상이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본문]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의 첫번째절 강화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落伽山普門寺) 33관음성지(三十三観音聖地)의 첫번째절 강화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落伽山普門寺) 한국의 사찰(三十三観音聖地)순례 보문사(普門寺)
[본문] 호국참회기도 도량 삼각산 도선사(道詵寺) 한국의 사찰(三十三観音聖地)순례 두번째 호국참회기도 도량 삼각산 도선사(道詵寺)
[본문]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曹渓寺) 한국의 사찰(三十三観音聖地)순례 첫번째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曹渓寺)
[본문] 한국 사찰의 가람(伽藍, 절의 구성) 한국 사찰의 가람(伽藍, 절의 구성) 한국의 사찰(三十三観音聖地)순례를 준비하면서
[본문] 성탄절에 찾은 길상사(吉祥寺) 대원각(大苑閣)’이라는 음식점에서 법정스님의 길상사(吉祥寺)라는 사찰로 바뀐곳을 성탄절에 찾아봤다.
[본문] 정조대왕의 효성이 묻어있는 용주사(龍珠寺)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가 있었다. 고려 광종21년(970)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된 후 폐사가 되었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고 낙성식날 밤 정조가 꿈을 꾸니 용(龍)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이름을
[본문]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는 1200년된 서울 도심의 봉은사(奉恩寺) 서울 새로운 중심지인 삼성도에 있고,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있는 1200년된 서울 도심의 봉은사(奉恩寺)
[본문] 경녕군의 어머니 태종후궁 효빈김씨의 아차산 효빈묘(孝嬪墓) 같은 태종의 후궁이면서 같은지역에서 사적으로 등록되어있지않은, 태종의 첫째아들 경녕군의 어머니 효빈김씨묘 효빈묘(孝嬪墓)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한번째 여주 영녕릉과 최종 마무리 여주 영녕릉을 마지막으로 열한번째 에 걸친 조선왕조 왕릉 탐사를 마무리했다.
[본문]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의 여주 녕릉(寧陵)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옥체를 모셨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본문]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 4대 세종(世宗)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주 영릉(英陵)은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장릉,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조선왕릉 탐사 열번째 단종의 짧은 삶의흔적 영월장릉, 사약받은 관풍헌 그리고 유배지 청령포
[본문] 17살의 짧은 삶.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17살의 어린나이에 작은아버지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한 조선 왕조 6대 단종(端宗)의 영월 장릉(莊陵)
[본문] 조선시대 최대의 행궁(行宮)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 행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에 머무는 임시 처소이자 수원 신읍치의 관아로서 건립되었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이장하고 그곳에 있던 수원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함에 따라, 수원부의 관아를 옮겨짓고 행궁의 역할을 겸하게 하였다. 1793년(정조 17) 화성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를 화성 행궁
[본문] 죽어서까지 아버지옆에 묻힌 효자 정조대왕의 융건릉(隆健陵)내 건릉(健陵)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후 순조21년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본문] 당파의 희생양이된 사도세자 장조(莊祖), 경의왕후의 융건릉(隆健陵)내 융릉(隆陵) 원래 휘경동 배봉산(拜峰山)에 조성되어 영우원(永佑園)이었으나, 지금의 화산(花山) 기슭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 장헌세자는 28세 때 창경궁에서 죽었으며 영조가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였고, 장조로 추존되었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세자가
[본문] 조선왕조 왕릉 탐사 마무리(릉원묘 분포도및 조선왕조 릉/원/묘 링크 앨범) 조선왕조 왕릉 탐사 1,2차를 마무리 하면서, 촬영한 앨범을 연대순으로 링크했다.
[본문] 조선왕릉 탐사 일차 마지막, 비공개 회묘, 효릉, 후궁묘, 왕실 태실과 공순영릉,김포 장릉 조선왕릉 탐사 일차 탐사를 마무리 했다. 총 8번에 걸쳐서43개의 릉/원/묘를 2700여장, 6.5기가의 데이타를 구성했다. 지금부터는 정리를..
[본문]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 친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김포 장릉(章陵)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정원군은 처음엔 양주군 곡촌리에 묻혔다. 큰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정원군은 대원군에 봉해졌고, 묘가 원으로 추숭되어 흥경원(興慶園)이라 했다. 그후 인조는 정원군묘를 김포현의 성산 언덕으로 천
[본문] 왕비 책봉 7일 만에 폐출된, 인왕산 치마바위의 주인공인 중종원비 단경왕후신씨 온릉(溫陵) 연산군에게 여동생을 시집보내 영의정이 된 신수근.중종이 왕자시절 딸을 시집왕자비로 시집보냈다.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참살되고, 중종비가된 딸이 7일만에 페비가된 애처러운 사연.폐비가 된후 인완산에 치마를 걸어서 중종을 연모했었다.
[본문] 영조의 요절한 장자이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아버지가 된 추존왕 진종의 영릉(永陵) 진종은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3년후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孝章)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 후 1908년 황제로 추존, 진종소황제가 되었다.
[본문] 한명회의 넷째 딸로 언니의 릉의 옆에 있는 성종비 공혜왕후 한씨의 파주삼릉내 순릉(順陵)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 만에 승하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했고,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본문] 17세에 승하한 한명회의 셋째딸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의 파주삼릉내 공릉(恭陵) 세조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승하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
[본문] 8개월의 조선 최단재임이면서 효자였던 조선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비공개 효릉(孝陵)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로 왕위에 오른 지 9개월 만에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는 것과 죽은 뒤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어주고 장사를 소박하게 치를 것을 유교로 남기고 보령 3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종은 유교대로 어머니 장경왕후(희릉) 옆 언덕에 안장되었고, 인종의 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호를 ‘효릉’이라 했다. 인성왕후도 후일 인종 왼쪽에 비
[본문] 일제시대, 해방후 도시화로 한곳으로 모인 후궁묘, 왕자/공주의 묘 그리고 조선 왕실 태실 본래왕릉영역 내에는 후궁,왕자,공주의묘를 쓰지못하도록되어있으나, 일제시대및 해방후 도시화에 따른 개발과정에서 전국각지의 명산에 있는 후궁들의 묘, 왕자와 공주들의 묘, 그리고 조선왕조 왕실의 태실이 한곳에 모여있는 45묘, 태실54기가 들어있는 왕실의 집장묘.
[본문]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비공개 회묘(懷墓) 심한 투기와 모함으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묘비조차 없던 윤씨의 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허락했다.성종이 승하하고 그 국장기간에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의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으로 고쳤다.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
[본문]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연산군묘와 선정릉 조선왕릉 탐사 일곱번째. 광해군묘에 다녀오면서 오랫만에 예전에 살던 상계동과 몇년전에 있던 선정릉 바로앞의 사무실등등.
[본문] 왕비 3명의 능이 모두 별도로 있는 조선 11대 중종의 선정릉내 정릉(靖陵) 원래는 고양(高陽)에 예장하고 묘호를 중종, 능호를 희릉(禧陵)으로 했다가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정릉을 조영했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에 의해 선릉 동쪽의 언덕인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겨졌다.조성 당시부터 낮은 지세로 문제가 된 정릉은 조성 이후로도 숱한 침수를 겪었다.
[본문] 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정릉내 선릉(宣陵) 조선 9대 성종(成宗, 1457~94)과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의 능이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웠다.정
[본문] 딸,사위,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후궁 조씨와 같이 있는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의 사위인 능성구씨의 선산에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묘역 아래쪽에는 후궁인 의정궁주조씨묘(義貞宮主趙氏墓) 및 연산군(燕山君)사위 구문경묘(具文景墓)와 연산군(燕山君)딸의 묘가 있다.
[본문] 조선왕릉 탐사 여섯번째. 태강릉의 태릉,강릉 그리고 6.25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는 광릉 태강릉중에서 강릉은 비공개릉이었다. 예산등의 문제로 공개를 하지못하는데, 촬영을 할수없을뻔했으나, 태강릉 관리소장님의 배려로 소중환 촬영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본문] 힘들게 찍은 비공개릉 조선 13대 명종과 인순왕후심씨의 태강릉내 강릉(康陵) 명종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12세 나이로 왕위에 올라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가 죽은 지 2년 만에 의지했던 어머니 문정왕후마저 숨지자 명종은 마음의 병을 얻었다. 선정을 베풀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명종은 보령 34세로 승하했다.명종 승하한 후 인순왕후는 덕흥대원군(중종의 일곱째 아들)의
[본문] 8년간 수렴청정을한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태강릉내 태릉(泰陵)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 명종을 비롯해 1남 4녀를 두었다.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한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을 내세워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사건 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또 당대의 고승 보우(普雨)를 앞세워 불교 부흥을 도모했다. 6.25때 멸실된 것을 1994년 복원하였다.
[본문] 6.25때 기총소사에 박살난 무인석의 석마가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光陵) 조선 7대 세조(世祖, 1417~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83)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동식물의 낙원이자 천연의 자연 박물관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컸던 세조는 1452년 단종 즉위 후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권력을
[본문]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서오릉과 서삼릉 조선왕릉 탐사 다섯번째. 일산에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을 찾았다.서오릉의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서삼릉의 희릉, 예릉을 볼수있었다.또 서삼릉에서 관리하는 몇군데는 축협의 초지안에 릉이 있어서 볼수가없었다.
[본문] 서삼릉내의 의령원(懿寧園)과 효창공원에서 옮겨온 효창원(孝昌園) 의령원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큰아들 의소세손의 원이다. 태어난 다음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3세의 나이로 죽었다. 처음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현 추계예술대학, 중앙여고 자리)에 묻혔다가 1949년 이곳으로 이장. 효창원은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 문효세자의 원이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에 장사지내 효창묘라 했다가 효창원으로 바
[본문] 조선 11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서삼릉내 희릉(禧陵) 처음에는 헌릉 서쪽 언덕에 조성. 그런데 중종의 부마가 된 김안로가 세자(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희릉 천릉사건, 희릉 밑에 큰 돌이 깔려 있어 불길하다 하여 중종 32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중종의 유교에 따라 중종의 정릉을 희릉 옆에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릉과 왕비릉 중간으로 옮겨 세우고, 왕의 능호를 사용했다. 그후 문정왕후의 주장에 의해
[본문] 강화도령 조선 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의 서삼릉내 예릉(睿陵)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세도정치에 휘둘렸던 철종의 삶과는 달리, 철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철종의 능을 매우 거창하고 웅장하게 꾸미게 된다. 이는 왕실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강화를 꿈꾸던 대원군의 뜻이기도 하였다. 부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철인왕후는 1878년(고종 15)에 승하 후 철종 곁에 안장되었다 .
[본문] 숙종의 빈에서 왕비로, 다시 빈이 된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의 서오릉내 대빈묘(大嬪墓) 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왕자 윤(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숙종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올랐다.남인이 집권하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고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본문] 13년밖에 살지못한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와 그의 빈 공회빈윤씨 서오릉내 순창원(順昌園) 조선 13대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그의 빈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능이다.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한 채 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본문] 쌍릉으로 조성되었으나, 한쪽이 비어있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서오릉내 홍릉(弘陵) 영조는 정성왕후의 묏자리를 정하면서 능 오른쪽(바라보아 왼쪽)을 자신의 자리로 잡아놓으면서 쌍릉으로 예상하여 배치해놓았으나 영조 승하 후 정조는 영조의 능을 완전한 길지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원릉 자리(동구릉)에 정했으므로 홍릉은 이처럼 한 쪽에 빈 채로 남아 있다. 영조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정해놓았던 자리는 비어 있고(우허제右虛制) 그 앞으로 석물이 놓
[본문] 서오릉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조선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80) 김씨의 능이다. 인경왕후는 1670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승하했다. 슬하에 공주 셋을 낳았으나 명선·명혜·명안공주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본문] 조선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서오릉내 명릉(明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서오릉 안에 있는 익릉에 따로 안장되어 있고, 숙종은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등을 후궁으로 두었다.인현왕후는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희빈 장씨의 무고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숙종 26년 원인 모를 병으로 승하했다. 제2계비 인원왕후는 1702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757년 승하했다
[본문] 요절한 의경세자대신 즉위한 조선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서오릉내 창릉(昌陵) 8대 예종(睿宗, 1450~69)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1498) 한씨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로,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짧은 재위기간(14개월) .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세조의 승하를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했으나 반포
[본문] 성종의 아버지,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서오릉내 경릉(敬陵)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20세에 승하한후 둘째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왕대비(인수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내훈(內訓)』이란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대해 보복
[본문]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暎嬪) 이씨의 서오릉내 수경원(綏慶園)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 영빈(暎嬪) 이씨의 능.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영빈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와 사도세자를 낳았다. 그후사도세자가 폐위당하고 죽음을 맞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69세로 승하하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의식으로 장례지냈다. 처음에 지금의 연세대학교 안 수경원
[본문]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정릉, 홍릉길의영휘원과 숭인원 그리고 구 중앙정보부내부에 있던 의릉 조선왕릉 탐사 네번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그리고 영친왕의 아들의 이진의 묘 숭인원,그리고 구 중앙정보부내부에 있던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를 찾았다.
[본문]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의 아들 이진의 묘 숭인원 조선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아들 이진(1921~22)의 묘이다.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
[본문]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 고종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永徽園) 귀비 엄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5세에 경복궁에 들어가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였다.황귀비는 생전에 서구식 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양정의숙,진명여학교설립, 숙명여학교에 많은 기부
[본문] 구 중앙정보부가 망가트린 장희빈의 아들,경종의 의릉(懿陵) 오랫동안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정자각 앞에 연못을 파고 각종 정원수를 심어 변형시켜놓았던 것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을 되찾은 조선 20대 경종(景宗, 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30) 어씨의 능.
[본문] 태조 이성계에게 버들잎 떠있는 물바가지를 건넨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壽陵)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하였다. 조선 왕릉 첫 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태조에 이어 즉위한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고,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본문] 조선왕릉 탐사 세번째.세곡동 안기부옆의 헌인릉(獻仁陵) 헌릉(獻陵)은 조선 3대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며, 이 능을 바라보아 왼쪽에 있는 인릉(仁陵)은 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이 헌릉과 인릉을 합쳐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본문] 조선 23대 순조(純祖)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헌인릉의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純祖, 1790~1834)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 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외척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순조의 개혁정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의 문란, 매관매직 성행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사회가 혼란해졌고, 홍경래의
[본문]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헌인릉 헌릉(獻陵) 태종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정안군에 봉해졌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정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고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는 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태종이 왕권을 잡은 뒤
[본문] 조선왕릉 탐사 두번째.조선의 마지막 황제 홍유릉(洪裕陵)과 안타까운 사연의 사릉, 광해군묘 조선의비운의 황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마지막 황제 순종의 유릉이 있는 호유릉(洪裕陵), 안타까운 단종 비의 사릉, 불운의 왕제 광해군묘와 그의 어머니 성묘
[본문]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서울로 돌아오기위해 워키힐쪽으로 오는 아차산기슭에서 태종 후궁으로 성종까지 7대의 내명부를 지킨 명빈김씨의 아차산 명빈묘(明嬪墓)
[본문] 죽어서 어머니 발치에 묻힌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成墓) 불운의 왕제로서 죽은후에 어머니 발치에 묻히길바랬던 15대 폐위군주 광해군묘와 공빈(恭嬪)김씨의 성묘(成墓)
[본문]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영월에서 가엾게 죽어간 단종을 기리는 한많은 단종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
[본문]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의 삼합장릉인 유릉(裕陵) 조선 마지막 능으로 27대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1926)와 원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1872~1904),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의 삼합장릉이다.
[본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의 홍릉(洪陵) 비운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유릉의 홍릉(洪陵)
[본문] 조선왕릉 탐사 첫날 동구릉(東九陵) 조선의 왕과 왕비 17위의 유택이 마련돼 있는 곳으로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이름붙여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1408년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능지로 정해진 곳이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본문] 조선 5대왕 문종의 동원이강릉 형식인 동구릉 현릉(顯陵) 현릉(顯陵).조선 5대 문종(文宗, 1414~52)과 현덕왕후(顯德王后, 1418~41) 권씨의 능이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1450년 왕위에 올라 언로를 열어 민의를 파악했고, 문무를 중용하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문종은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보령 39세로 승하하였다. 문종의 시호는 공순(恭順)이다. 부
[본문] 추존왕 문조대왕이된 효명세자의 동구릉 수릉(綏陵) 수릉(綏陵).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30)와 신정황후(神貞皇后, 180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부터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며, 모든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의릉 왼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겼
[본문] 조선왕조 20대 경종의 윈비 단의왕후의 동구릉 혜릉(惠陵) 혜릉(惠陵).조선 20대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 1686~1718) 심씨 능이다. 단의왕후는 타고난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춰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숙종 44년 승하하여 숭릉 왼쪽 산줄기에 모셔졌다가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길게 자리하고
[본문] 조선 14대 선조대왕의 능이 3개인 동원이강릉인 동구릉의 목릉(穆陵) 목릉(穆陵).조선 14대 선조(宣祖, 1552~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1555~ 1600) 박씨 및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이 보이는데, 동원이강의 형식의 변형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본문] 조선왕조 18대 현종왕릉인 동구릉의 숭릉(崇陵) 조선 18대 현종(顯宗, 1641~74)과 원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83) 김씨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봉림대군(효종)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1649년(인조 27)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1659년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본문] 조선왕조 21대 영조대왕과 정순왕후 김씨의 동구릉 원릉(元陵) 원릉(元陵) .조선 21대 영조(英祖, 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1805) 김씨의 능이다.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52년) 왕으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본문] 조선왕조 태조이성계의 동구릉 건원릉(健元陵) 건원릉(建元陵)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능이다. 건원릉은 동구릉에서 가장 중앙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는 7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
[본문] 조선조왕릉중 유일한 삼연릉인 동구릉 조선 24대 헌종 경릉(景陵) 경릉(景陵) 조선 24대 헌종(憲宗, 1827~49)과 원비 효현왕후(孝顯王后, 1828~43)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1831~ 1904) 홍씨를 모신 삼연릉으로,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다. 정면에서 보아 제일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본문] 인조계비 장령왕후의 동구릉에 있는 휘릉(徽陵) 휘릉(徽陵)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88)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자의(慈懿)라는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다. 10년 뒤인 1659년 효종마저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숙종 14년 자손 없이 승하하여 건원릉 서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장
[본문]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 종묘(宗廟)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 종묘(宗廟)
[본문] 5대궁 탐사 5번째, 뼈아픈 역사를 지닌 경희궁 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敬德宮)이었다 한일합방 즈음에 각궁궐의 건물들은 사방팔방으로 찢겨져나가고,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부지가 되버렸던 대궁 탐사 5번째, 뼈아픈 역사를 지닌 경희궁
[본문] 임진왜란으로 궁이되고, 퇴위당한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그리고 고종즉위 40년 기념비 임진왜란으로 궁이되고, 퇴위당한 고종이 머물던 덕수궁그리고 고종즉위 40년 기념비
[본문] 오랫만에가본 벚꽃놀이,보트놀이하던 창경원에서 변한 창경궁 30년만에 가본 벚꽃놀이,보트놀이하던 창경원에서 변한 창경궁
[본문] 비정형적 조형미의 대표적인 궁,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동아시아 궁궐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자연환경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창덕궁을 찾아봤다.
[본문] 주말에 찾아간 조선의 정궐(正闕) 경복궁 서울에 온 첫주말 토요일에 조선의 정궐(正闕)인 경복궁을 찾아봤다. 예전에 가보았을때보다는 많이 복원이 이루어져있었다.
[본문] 세계지도(4번 줌,256배 확대) 세계지도(4번 줌,256배 확대)
[본문] 세계지도(3번 줌,64배 확대) 세계지도(3번 줌,64배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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